2025년 5월 17일, 오늘은 1980년 5월 17일에 발생한 5·17 쿠데타로부터 45년이 되는 날입니다. 5·17 쿠데타는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비상계엄 확대 조치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사건으로,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제5공화국이라는 권위주의 체제를 탄생시킨 비극적 전환점으로 기억됩니다. 이 글에서는 신군부의 기원, 5·17 쿠데타의 전개 과정, 그로 인한 정치적·사회적 파장, 그리고 후속 영향을 상세히 다루겠습니다.
1. 신군부의 기원과 배경
신군부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이후 등장한 군부 내 새로운 권력 집단을 지칭합니다. 박정희의 유신 체제가 18년간 지속되며 한국 사회는 경제적으로는 급성장했으나, 정치적으로는 극단적인 억압과 독재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암살되자, 권력의 공백이 발생했고, 이는 한국 사회에 큰 변화를 예고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하며 과도 정부를 이끌었고,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력은 이미 군부 내에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신군부의 핵심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라는 군 내 사조직이었습니다. 하나회는 육군사관학교 11기 출신 장교들로 구성된 비공식 모임으로, 1960년대부터 군 내부에서 결성되어 권력과 승진을 공유하며 세력을 키워왔습니다. 전두환은 1979년 10·26 사건 직후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수사하면서 정치적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곧 보안사령관으로 임명되며 군부 내 실세로 부상했습니다.
1979년 12월 12일, 신군부는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군부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이 사건에서 전두환과 노태우를 비롯한 하나회 세력은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체포하고, 군 내부 반대 세력을 무력화하며 실질적인 군권을 장악했습니다. 미국은 이 사건에 대해 우려를 표했으나,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장악하고 있던 미국은 신군부의 행동을 사실상 묵인했습니다. 이는 이후 신군부가 5·17 쿠데타로 정권 장악을 시도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당시 한국 사회는 10·26 이후 이른바 "서울의 봄"이라 불리는 민주화의 기대감이 커지고 있었습니다. 정치권에서는 계엄 해제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통해 유신 체제를 종식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학생과 시민들은 군부 퇴진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신군부는 이러한 민주화의 흐름을 받아들이지 않고, 권력을 유지하고 확대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2. 5·17 쿠데타의 전개 과정
5·17 쿠데타는 신군부가 비상계엄 확대 조치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사건으로, 1980년 5월 17일 자정에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12·12 군사 반란 이후 약 5개월 만에 이루어진 두 번째 쿠데타로, 신군부가 군부 권력뿐 아니라 정치적 실권까지 완전히 장악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2.1. 쿠데타의 준비와 "북괴남침설" 조작
신군부는 1980년 5월 초부터 정국 장악을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4월 말부터 학생 시위가 전두환을 향해 격화되자, 전두환은 보안사 내부에서 시국 수습 방안을 논의하도록 지시했습니다. 5월 12일, 보안사 정보처장 권정달은 '비상계엄 전국 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를 골자로 하는 시국 수습 방안을 보고했고, 이는 신군부의 집권 시나리오로 채택되었습니다.
신군부는 비상계엄 확대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북괴남침설"을 조작했습니다. 전두환은 5월 12일 심야 임시 국무회의에서 북한의 남침 위협이 임박했다는 과장된 보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국무부는 5월 13일 "북한에서 평소와 다른 부대 이동은 없으며, 한국에 대한 공격이 임박했다는 움직임은 없다"고 발표했고, 주한미군 사령관 존 위컴은 이를 "전두환이 청와대의 주인이 되기 위한 구실"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일본 내각 조사실 한반도 담당반장과 나카소네 야스히로 당시 방위성 장관도 "그런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한 적 없다"고 밝히며, 북괴남침설이 신군부에 의해 조작된 허위 정보임을 확인했습니다.
2.2. 비상계엄 확대와 권력 장악
1980년 5월 17일, 신군부는 계획대로 비상계엄 확대를 실행에 옮겼습니다. 이날 저녁 9시 40분, 신현확 국무총리 주재로 확대 국무회의가 열렸습니다. 외부와의 전화선이 차단되고, 청와대 내부에 무장 군인들이 배치된 공포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회의는 단 8분 만에 아무런 토론 없이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의결했습니다. 이는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 윤보선 대통령이 쿠데타를 오판해 지지했던 상황보다도 더 허술한 통과였습니다.
밤 11시 40분, 최규하 대통령은 신군부의 꼭두각시로 전락한 상태에서 문화공보부 장관 이규현을 통해 5월 17일 자정부터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계엄사령관 이희성 명의로 계엄포고 제10호가 발령되며, 정치활동 전면 금지, 대학 휴교령, 언론보도 사전 검열 강화, 집회 및 시위 금지 등의 조치가 시행되었습니다. 계엄군은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했고, 신군부는 영장 없이 학생, 정치인, 재야인사 2,699명을 구금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이휘락 등 주요 정치인들이 체포되었고, 이들은 이후 사형 선고를 받게 됩니다.
2.3. 신군부의 강압적 통제
비상계엄 확대 후, 신군부는 철저한 통제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대학은 폐쇄되었고, 언론사들은 검열과 통제를 받았으며, 3인 이상의 공공 집회는 장례식을 제외하고 모두 금지되었습니다. 신군부는 중앙정�부를 활용해 학생 지도자와 정치인들을 체포했고, 5월 17일에는 전국 55개 대학의 학생회장단이 모인 전국학생연합회의를 급습해 참가자들을 구금했습니다.
특히, 신군부는 김대중을 내란죄로 몰아넣기 위해 "김대중 사건"을 조작했습니다. 5월 17일 밤부터 연행된 관련자들은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에서 극악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김대중의 측근인 김옥두는 60일간의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끝내 혐의를 부인했고, 김대중의 큰아들 김홍일은 고문 끝에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신군부는 김대중이 광주 사태의 배후라는 거짓 혐의를 씌우려 했으나, 이는 모두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3. 5·17 쿠데타의 즉각적 파장
5·17 쿠데타는 한국 사회에 즉각적이고도 심각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이는 단순히 권력의 이동을 넘어 민주주의의 근간을 파괴하고, 인권을 유린하며,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켰습니다.
3.1. 5·18 광주 민주화 운동
5·17 쿠데타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반발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었습니다. 5월 18일, 광주 시민들은 신군부의 비상계엄 확대와 정치적 억압에 항의하며 거리로 나왔습니다. 신군부는 이를 폭력적으로 진압했고, 광주는 유혈 사태로 얼룩졌습니다. 신군부는 광주 시민들을 "폭도"로 몰아 무력으로 진압했으며, 이는 수백 명의 사망자와 수천 명의 부상자를 낳는 비극으로 이어졌습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신군부의 폭압적 통치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 되었고, 이후 한국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신군부는 5·18을 "내란"으로 규정하며 책임을 회피하려 했으나, 이는 1997년 12·12 및 5·18 사건 재판에서 내란죄로 인정받아 전두환과 노태우가 처벌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3.2. 정치적 자유의 억압
5·17 쿠데타로 신군부는 정치적 자유를 철저히 억압했습니다. 국회는 폐쇄되었고, 모든 정당과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습니다.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5월 20일 상도동 자택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오늘 계엄통치를 확대 강화한 5·17 사태를, 민주회복이라는 국민적 목표를 배신한 폭거로 규정한다"고 신군부를 규탄했으나, 곧 연금 상태에 놓였습니다.
미국 국무부는 5월 18일과 19일 연속으로 성명을 발표해 신군부의 조치에 깊은 우려를 표하며, 비상계엄 확대와 정치 지도자 체포에 대해 유감을 표했습니다. 미국은 최규하 대통령이 약속했던 헌법 개정과 문민 정부 수립이 즉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으나, 신군부는 이를 무시하고 권력 장악을 계속했습니다.
3.3. 언론 통제와 사회적 공포
신군부는 언론에 대한 검열을 강화하며 사회적 공포를 조성했습니다. 신문사와 방송사는 사전 검열을 받아야 했고, 정부에 비판적인 보도는 철저히 차단되었습니다. 외신 기자들만이 광주 사태와 같은 신군부의 만행을 알릴 수 있었으나, 군대의 통제로 인해 보도에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는 한국 사회에 정보의 자유를 억압하고, 공포 분위기를 확산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4. 제5공화국의 탄생과 신군부의 통치
5·17 쿠데타 이후 신군부는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며 제5공화국 체제를 수립했습니다. 이는 한국 현대사에서 또 한 번의 권위주의 통치로 이어졌습니다.
4.1.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
신군부는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하며 행정, 입법, 사법 삼권을 모두 장악했습니다. 국보위는 박정희 정권의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모방한 기구로, 신군부가 권력을 독점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하자, 전두환은 9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10월 27일, 국보위는 정치규제법을 통해 기존 정당과 국회를 강제 해산했고, 제5공화국 헌법을 제정했습니다. 이 헌법은 대통령 간선제를 유지하며 전두환의 장기 집권을 보장하는 구조를 갖추었고, 1981년 전두환은 제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제5공화국이 공식적으로 출범했습니다.
4.2. 신군부의 통치 방식
제5공화국은 철저한 권위주의 통치로 특징지어졌습니다. 신군부는 중앙정보부를 활용해 반대 세력을 탄압했고, 언론과 학계를 통제하며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화했습니다. 특히, "3S 정책"(스포츠, 섹스, 스크린)을 통해 국민의 정치적 관심을 분산시키려 했고, 1983년 프로야구 출범과 컬러 TV 방송 도입 등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러나 신군부의 통치는 끊임없는 저항에 직면했습니다. 1980년대 내내 학생과 시민들은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1987년 6월 항쟁은 신군부의 통치를 종식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었고,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며 제5공화국은 막을 내렸습니다.
5. 5·17 쿠데타의 장기적 영향
5·17 쿠데타는 한국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으며,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5.1. 민주주의의 후퇴와 저항의 씨앗
5·17 쿠데타는 "서울의 봄"으로 상징되던 민주화의 희망을 짓밟았습니다. 신군부의 권력 장악은 민주적 절차를 파괴하고, 권위주의 통치를 재확립하며 한국의 민주화를 지연시켰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과 같은 저항이 발생하며,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광주는 이후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 되었고,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동력이 되었습니다.
5.2. 신군부에 대한 법적·역사적 평가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신군부에 대한 처벌 요구가 높아졌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5·13 담화에서 "문민정부는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밝히며 5·18을 재평가했으나, 전두환과 노태우를 법적으로 처벌하기보다는 "역사의 평가에 맡긴다"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1995년 시민들의 지속적인 요구로 전두환과 노태우는 내란죄로 기소되었고, 1997년 대법원은 이들에게 내란죄를 적용해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5.3. 현대 한국 사회에 남은 과제
5·17 쿠데타와 신군부의 통치는 한국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의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과 명예 회복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신군부의 잔재 청산은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또한, 군부의 정치 개입 방지와 민주적 통제 강화는 현대 한국 사회가 지속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6. 결론
5·17 쿠데타는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며 한국 민주주의를 억압한 비극적 사건입니다. 전두환과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비상계엄 확대를 통해 정권을 장악했고, 이를 기반으로 제5공화국이라는 권위주의 체제를 수립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과 같은 비극이 발생했고, 한국 사회는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신군부의 억압은 민주화를 위한 저항의 씨앗을 뿌렸고, 이는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져 민주주의를 되찾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25년 5월 17일, 45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5·17 쿠데타를 되새기며 민주주의의 소중함과 그를 지키기 위한 투쟁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신군부의 과오를 기억하고, 민주적 가치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