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현(崔益鉉, 1833년 ~ 1906년)은 조선 말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입니다. 그는 척사위정론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외세의 침략에 맞섰고, 불의에 굴하지 않는 강직한 성품으로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민족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친 그의 삶은 오늘날까지도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이제 그의 파란만장했던 삶과 치열했던 투쟁을 다섯 가지 주제로 나누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위정척사의 기수, 개항 반대와 항일 투쟁의 시작
최익현은 일찍부터 성리학에 매진하며 전통적인 가치관을 확립했습니다. 그는 서양의 문물과 사상이 조선에 들어오는 것에 대해 강한 경계심을 나타냈으며, 특히 일본의 침략 야욕을 간파하고 개항을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에는 척사상소운동을 주도하며 민족의 위기의식을 고취하고 항일 투쟁의 불씨를 지폈습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당시 많은 선비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을미사변과 의병 봉기, 꺼지지 않는 저항의 불꽃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최익현은 70세가 넘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일으켜 항일 투쟁에 나섰습니다. 그는 전라북도 태인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창의토왜(倡義討倭)’의 기치를 내걸고 일본군과 맞서 싸웠습니다. 비록 그의 의병은 일본군의 강력한 진압으로 인해 실패했지만, 그의 용기와 애국심은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민족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을사늑약 반대 투쟁과 유배, 그리고 순국
1905년 일본이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자, 최익현은 다시 한번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그는 상소를 통해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고, 전국 각지의 유생들에게 항일 투쟁에 나설 것을 촉구했습니다. 결국 일본 경찰에 체포된 그는 쓰시마 섬으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일본이 주는 식량을 거부하며 “왜인의 밥은 먹을 수 없다”고 외치다 순국했습니다. 그의 숭고한 죽음은 민족에게 큰 슬픔과 함께 강한 저항 의지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결론: 민족의 혼, 최익현이 남긴 숭고한 정신
최익현은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굳건한 신념과 불굴의 의지로 민족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친 위대한 우국지사입니다. 그의 강직한 성품과 타협을 모르는 저항 정신은 암울했던 시대에 민족의 희망이 되었으며, 그의 숭고한 애국심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깊은 감동과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의 정신은 민족의 혼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