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이기붕 권력의 정점과 갈등의 심화, 비극적 최후

by 역사 & 시사 2025. 4. 19.

이기붕 가족 사진

**이기붕 권력의 정점에서 파멸로**

이기붕(李起鵬, 1896년 ~ 1960년)은 대한민국 제1공화국 시절, 이승만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자유당의 핵심 인물로 막강한 권세를 휘둘렀던 정치 거물이었다. 일제강점기 미국 유학 시절 이승만과 인연을 맺은 그는 광복 후 귀국하여 이승만 정권 수립에 깊이 관여했다. 정부 수립 후 국방부 장관, 서울특별시장 등 요직을 거치며 이승만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정치적 입지를 굳건히 했다. 특히 자유당의 실질적 2인자로 부상하여 당무 전반을 장악하고 국회의장까지 역임하며 입법부 수장으로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의 정치적 행보는 제1공화국의 권위주의적 통치 강화와 장기 집권 시도와 맥을 같이하며 사회적 논란과 비판을 야기했다. 이기붕은 이승만 대통령의 후계자로까지 거론될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움켜쥐었지만, 그 힘은 국민의 지지보다는 이승만과의 관계에서 기인한 측면이 컸다. 그의 생애는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권력의 정점에 섰던 한 개인이 어떻게 비참하게 몰락하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 사례다. 그의 이름은 1960년 4.19 혁명의 불씨가 되었으며, 한국 정치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정치적 부상과 갈등의 심화**

이기붕의 정치적 영향력은 자유당 창당 이후 더욱 증폭되었다. 그는 자유당 내 핵심 세력인 소위 '이 아무개 라인'의 수장으로서 당내 기반을 다졌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의중을 가장 정확히 파악하고 실행하는 인물로 널리 알려졌다. 국방부 장관 재임 시 국군 창설 및 강화에 기여한 공로도 있으나, 이후 그의 정치 행보는 권력 유지를 위한 편법과 불법 행위와 얽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1954년부터 1960년까지 국회의장을 역임하며 이승만 정부의 정책을 입법적으로 뒷받침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사사오입 개헌(四捨五入改憲)과 같은 중대한 정치적 사건에서 이승만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앞장섰으며, 이는 의회민주주의를 훼손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의 권력은 그의 가족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아들 이강석은 이승만의 양자가 되면서 '권력의 아들'로 불리며 갖가지 기행과 특혜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로 인해 이기붕 일가는 국민들로부터 '특권층'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받게 되었고, 이는 자유당 정권에 대한 반감을 증폭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기붕 자신 또한 부정부패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그의 측근들은 권력을 이용하여 사익을 추구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1960년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기붕은 자유당의 부통령 후보로 나섰다. 당시 고령의 이승만 대통령을 대신해 부통령 자리는 차기 대통령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 매우 중요한 자리였다. 이기붕은 이 선거에서 당선되기 위해 정부 조직과 자유당을 총동원하여 부정선거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사전 투표함 바꿔치기, 득표수 조작 등 전례 없는 규모의 부정행위가 자행되었고, 이는 결국 4.19 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그의 정치적 야욕과 무리한 권력 추구는 스스로의 몰락은 물론, 제1공화국 전체의 붕괴를 초래했다.

**4.19 혁명과 비극적 최후**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제4대 정·부통령 선거는 역사상 전례 없는 부정선거로 얼룩졌다. 당시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과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을 위해 경찰, 관공서, 자유당 조직을 총동원하여 노골적인 부정행위를 자행했다. 야당 후보에 대한 방해 공작은 물론, 유권자에 대한 감시와 강요, 투표함 바꿔치기, 개표 조작 등 상상 이상의 부정행위가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이러한 부정선거는 국민들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특히 마산에서 부정선거 규탄 시위 중 실종되었다가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된 김주열 학생의 죽음은 전 국민적 공분을 샀다.

마산에서 시작된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4월 19일에는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학생들이 주축이 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이것이 바로 4.19 혁명이다. 학생과 시민들은 "부정부패를 타도하라!", "이기붕은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와 독재에 항거했다. 시위는 격렬해졌고, 경찰의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저항은 꺾이지 않았고, 시위대의 분노는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부정선거의 주역인 이기붕에게 집중되었다.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고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압력에 직면했고, 결국 4월 26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자유당 정권은 붕괴되었다. 4.19 혁명으로 모든 것을 잃게 된 이기붕 일가는 경무대(현 청와대) 근처 자택에 머물고 있었다. 그리고 4월 28일 새벽, 그의 아들 이강석은 권총으로 자신의 부모인 이기붕과 박마리아, 그리고 동생을 살해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권력의 정점에서 누리던 영화가 처참한 가족 비극으로 끝을 맺은 것이다. 이기붕의 최후는 제1공화국 몰락의 비극적인 상징으로 남았다. 그의 삶은 권력이 어떻게 한 개인과 가족을 파멸로 이끌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뼈아픈 교훈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