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는 단순한 독립운동가나 교육자가 아닌, 시대를 앞서간 실천적 기업가였습니다.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민족자본을 일으키고, 언론과 교육, 정치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며 ‘민족의 실력양성’이라는 현실적인 항일 전략을 펼쳤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필요한 '지속가능한 기업가 정신'과 ‘실용 민족주의’의 표본으로 다시 조명받고 있는 인물입니다. 본 글에서는 김성수의 생애, 업적, 평가를 중심으로 그의 의미를 재조명해보고자 합니다.
김성수의 생애: 호남 청년에서 민족 지도자로
김성수(1891~1955)는 전라북도 고창에서 유력한 지주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부터 유교 교육을 받고 성장했으며, 근대 문물을 접하기 위해 일본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유학했습니다. 하지만 학업 도중 나라 잃은 현실과 마주하며 깊은 고민에 빠졌고, 본격적으로 민족운동에 참여하게 됩니다.
귀국 후 그는 단순한 이상주의적 독립운동이 아닌, 민족 실력 양성론에 기반한 독립운동에 나섭니다. 이 과정에서 기업 설립, 언론 창간, 교육기관 운영 등 다양한 방면에서 실천적 활동을 벌였습니다. 특히 1920년 창간된 동아일보는 그의 독립운동 노선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결과물이었습니다. 당시 일제의 언론 통제 속에서도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기사를 끊임없이 내보냈고, 이는 일반 국민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호남을 중심으로 한 민족 자본을 기반으로 경성방직, 조선생명보험,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 등 여러 기업을 설립하며 민족경제의 자립을 꾀했습니다. 김성수는 “말이 아니라 돈이 나라를 일으킨다”는 신념으로, 경제 독립이 곧 정치 독립으로 이어진다고 믿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내내 끊임없이 기업 활동과 언론, 교육의 영역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이승만 정부 아래에서 초대 부통령과 국무총리 서리를 지내는 등 정치무대에서도 중심 인물로 활약했습니다. 그의 생애는 민족의 위기 속에서 현실적 해결책을 찾기 위한 끝없는 고민과 실천으로 가득했습니다.
김성수의 업적: 민족 자본과 고려대학교
김성수가 남긴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민족자본 형성과 고등 교육기관 설립입니다. 일제강점기 한국 사회는 일본 자본에 종속되어 있었고, 대부분의 사업체는 외국계였던 상황에서 그는 순수 민족자본 기업들을 설립하고 키워나갔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경성방직입니다. 이 기업은 단순한 섬유 회사가 아니라, 여성 노동자 고용 확대와 근로복지 향상을 시도한 개혁적 기업이었습니다.
또한 금융 산업에서도 조선생명보험과 같은 회사들을 세우며 조선인 스스로 자산을 관리하고 축적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이는 식민지 경제구조에 종속되어 있던 당시 조선 사회에 큰 충격이자 전환점을 제공했습니다.
교육 분야에서도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습니다. 1932년, 김성수는 일제하 경성법학원을 인수하고, 이를 기반으로 보성전문학교를 성장시켜 오늘날의 고려대학교로 발전시켰습니다. 그는 "나라를 일으킬 인재는 교육에서 나온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자비를 들여 학교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고, 우수한 교수진을 영입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가 추구한 교육은 단순한 학문 전달을 넘어, 민족 정신과 실용 능력을 겸비한 인재 육성이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고려대학교의 정체성과 교육 이념에도 깊게 스며들어 있으며, 당시 학생들은 그를 ‘참된 사학 설립자’로 기억했습니다.
또한 그는 동아일보를 통해 수많은 언론인, 사상가, 문학가들을 배출했고, 언론이 사회와 민족을 이끄는 중요한 지식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김성수는 사상과 이념보다 ‘실천’을 중시했으며, 독립운동을 위한 기반 마련이라는 점에서 그의 업적은 현대에도 그 가치가 여전히 유효합니다.
김성수의 평가: 시대를 앞서간 실용 민족주의자
김성수는 과거에는 친일 논란 등으로 인해 과소평가되기도 했지만, 최근 들어서는 그의 실용 민족주의적 철학과 기업가 정신이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 ESG 경영, 사회적 기업, 공공성과 수익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기업들이 주목받는 시대에, 김성수의 활동은 매우 시사적입니다.
그는 “정치만으로는 나라가 설 수 없다. 경제와 교육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실질적 행동을 이어간 인물이었습니다. 특히 동아일보를 통한 민중 계몽, 고려대학교를 통한 인재 양성, 기업을 통한 자본 형성은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그가 단순한 재벌이 아닌, 사회적 가치 실현을 지향한 공익 기업가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물론 그의 정치 참여에는 논란도 있었습니다. 해방 이후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과 협력하면서 권위주의적 정치를 용인했다는 비판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당시 정세를 고려하면, 그의 현실적 선택은 정치적 혼란을 최소화하고자 했던 노력의 일환으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김성수는 자본주의를 단순한 이윤 창출이 아닌, 민족 자립을 위한 도구로 보았으며, 이는 단순한 경제인의 시각을 넘어선 철학적 깊이를 보여줍니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도 그가 강조했던 책임 있는 자본, 공공성과 교육 중심의 성장, 언론과 지식인의 역할은 여전히 유효한 과제입니다.
그는 분명히, 오늘날 ‘지속 가능한 발전’을 말하는 이 시대에 앞서서 그런 가치를 실천한 선구자라 할 수 있습니다.
결론: 김성수, 다시 생각하는 기업가 정신의 원형
김성수는 단순히 돈을 번 사람이 아니라, 자본을 통해 민족을 살리고 미래를 설계한 ‘실천적 기업가’였습니다. 그의 생애는 불의한 시대를 살아가며 좌절 대신 실천을 택한 삶의 기록이며, 오늘날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기업가 정신의 원형입니다. 교육과 언론, 경제를 아우르며 민족의 자립과 미래를 위해 헌신한 그의 행보는, 지금 우리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우리는 이제, 김성수를 단순한 과거의 인물이 아닌 현재에 필요한 비전의 인물로 다시 읽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