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17일 오전 08:35 KST 기준으로, 5·18 광주항쟁(5·18 민주화운동)은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들의 저항과 희생을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 지역에서 벌어진 이 항쟁은 신군부의 폭력적 억압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광주 시민들의 치열한 투쟁이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광주항쟁의 역사적 배경, 전개 과정, 주요 사건, 희생과 결과, 그리고 그 이후의 역사적 의의와 현재적 과제를 상세히 다루겠습니다.
1. 광주항쟁의 역사적 배경
광주항쟁은 1970년대부터 이어진 한국의 정치적 억압과 민주화 열망의 연장선에서 발생한 사건입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은 경제 발전을 명분으로 권위주의 통치를 강화하며 민주주의를 억압했습니다. 1972년 유신체제 선포로 박정희는 사실상 종신 집권을 꾀했고, 이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은 가혹한 탄압을 받았습니다. 특히 전라남도와 광주는 역사적으로 정치적 소외와 차별을 겪어온 지역으로, 반정부 및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자원의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전라도를 경제적·정치적으로 소외시켰고, 이는 지역 주민들의 불만을 키웠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암살되는 10·26 사건으로 유신체제가 붕괴하면서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폭발적으로 분출했습니다. 이른바 “서울의 봄”으로 불리는 이 시기에 노동자, 농민, 학생, 재야 인사들은 민주적 헌법 개정과 자유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며 민주화의 꿈은 다시 좌절되었습니다.
신군부는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정치적 반대 세력을 탄압하고,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습니다. 비상국무회의는 5월 17일 밤 9시 40분에 계엄포고 10호를 의결하고, 11시 40분에 이를 발표하며 각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김대중, 김종필 등 주요 정치 인사와 학생 운동 지도자들이 연행되었습니다. 계엄사령부는 정치활동 중지, 집회 및 시위 금지, 언론 검열 등을 강제하며 국민의 기본권을 철저히 억압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광주항쟁의 불씨가 점화되었습니다.
2. 광주항쟁의 전개 과정
광주항쟁은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약 10일간 이어졌으며, 크게 초기 시위, 시민군의 저항, 계엄군의 최종 진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2.1. 초기 시위와 계엄군의 폭력 (5월 18일~19일)
광주항쟁은 5월 18일 아침,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비상계엄과 휴교령에 반발한 전남대 학생들이 교문 앞에 모여 시위를 벌였고, 계엄군(7공수여단)은 이를 강제 해산시키며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학생들은 “비상계엄 해제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저항했으나, 공수부대는 곤봉, 총기 개머리판, 대검까지 동원해 무자비한 진압을 감행했습니다. 이날 하루 동안 학생 224명, 일반인 181명 등 총 405명이 연행되었고, 부상자가 속출했습니다.
시위는 금남로와 광주 시내 곳곳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계엄군의 폭력은 학생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에게도 가해졌습니다. 공수부대원들은 시내에서 젊은 남성들을 무차별적으로 구타하고 연행했으며, 심지어 민가에 침입해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당시 중앙일보 기자 장재열의 기록에 따르면, 군인들이 금남로에서 연행자들을 옷 벗기고 구타하거나 대검으로 찌르는 등의 잔혹 행위가 자행되었습니다. 이러한 폭력은 시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점차 더 많은 시민이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5월 19일에는 11공수여단이 추가로 광주에 투입되며 진압이 더욱 강경해졌습니다. 공수부대는 2인 1조로 순찰하며 금남로 일대를 완전히 통제했고, 시위대뿐 아니라 지나가던 시민들까지 공격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부상자와 사망자가 급증하며 광주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2.2. 시민군의 저항과 광주의 해방 (5월 20일~26일)
5월 20일부터 광주항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습니다. 계엄군의 폭력에 분노한 시민들이 대규모로 시위에 참여하며 저항이 조직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택시 운전사들을 중심으로 100여 대 이상의 차량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금남로를 중심으로 벌어졌습니다. 시민들은 계엄군의 진압에 맞서 무기를 꺼내 들었고, 5월 21일에는 시민군이 조직되어 계엄군을 광주 외곽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5월 21일부터 26일까지 약 닷새 동안 광주는 시민들에 의해 자치적으로 운영되는 “해방구”가 되었습니다. 시민들은 신부, 목사, 변호사, 교수 등으로 구성된 수습대책위원회를 결성해 계엄사와 협상을 시도했고, 학생 중심의 학생수습대책위원회는 시내 치안과 질서 유지를 담당했습니다. 시장 상인들은 밥을 지어 시민군에게 제공하고,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거리를 청소하며 공동체를 유지했습니다. 전남도청 분수대에서는 매일 시민궐기대회가 열렸고, 성명서와 유인물이 배포되며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공유되었습니다.
이 시기 광주 시민들은 놀라운 시민정신과 도덕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외신기자들에 따르면, 계엄군이 철수한 상황에서도 큰 사건사고 없이 자치질서를 유지했으며, 부상자 치료를 위한 헌혈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이는 광주항쟁이 단순한 폭동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한 공동체적 저항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2.3. 계엄군의 최종 진압 (5월 27일)
5월 26일 새벽,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워 광주 시내로 재진입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시민 대표들은 맨몸으로 탱크를 저지하려 했으나, 5월 27일 새벽 4시경 계엄군 특공대가 전남도청을 향해 진격하며 최종 진압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고, 윤상원을 비롯한 많은 시민군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도청 광장에서는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절박한 외침이 울려 퍼졌습니다.
교전은 약 1시간 남짓 이어졌고, 계엄군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서 시민군은 결국 진압되었습니다. 이날 전남도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는지 정확한 수치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으나, 많은 이들이 산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희생자들은 망월동(현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3. 광주항쟁의 희생과 결과
광주항쟁은 큰 인명 피해를 남겼습니다. 정부 공식 집계에 따르면 사망자 165명, 행방불명자 65명, 상이 후 사망자 376명 등 총 606명이 희생된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암매장자와 미신고 인원을 포함하면 실제 피해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편, 계엄군 측에서는 22명의 군인과 4명의 경찰이 사망했으며, 이 중 13명은 송암동에서 발생한 아군 간 오인사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광주항쟁은 신군부의 잔혹한 진압으로 일단락되었으나, 그 여파는 한국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항쟁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김대중을 배후 조종자로 몰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조작했습니다. 또한, 광주는 철저히 고립되었고, 계엄군에 의해 통신과 교통이 차단된 상황에서 온갖 유언비어가 퍼졌습니다. 신군부는 항쟁을 북한의 사주로 몰아 왜곡했으며, 이는 이후 수십 년간 광주항쟁의 진실을 가리는 데 악용되었습니다.
4. 광주항쟁의 역사적 의의
광주항쟁은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그 의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4.1. 민주주의를 위한 저항의 상징
광주항쟁은 신군부의 군사독재에 맞선 민주주의 저항의 상징입니다. 광주 시민들은 계엄군의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이는 이후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한국 민주화 운동의 정서적·이념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뉴욕타임스 기자 심재훈은 “광주항쟁이 없었으면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세계에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라며, 광주항쟁이 세계 현대사에서 민주화 운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고 평가했습니다.
4.2. 시민 공동체의 모범
광주항쟁 기간 동안 계엄군이 철수한 닷새간, 광주 시민들은 자치 공동체를 형성하며 높은 도덕성과 연대감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저항을 넘어 공동체적 가치를 실현하려는 민중주의적 지향을 보여줍니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치안을 유지하고, 서로를 돕는 모습을 통해 민주주의의 본질이 무엇인지 실증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4.3.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광주항쟁은 이후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긴 여정을 남겼습니다. 1988년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를 통해 계엄군의 폭력 실상이 공개되었고,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은 “광주항쟁이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되었다”며 민주화 운동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했습니다. 1995년 5·18 특별법 제정으로 전두환과 노태우 등 신군부 주요 인사들이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죄로 처벌받았습니다. 전두환은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이후 종신형으로 감형되었고, 노태우는 22.5년 형을 선고받아 17년으로 감형되었습니다.
2011년에는 5·18 관련 자료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며, 광주항쟁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민주화 운동임을 확인받았습니다. 또한, 2018년에는 군이 헬리콥터로 시민을 향해 발포한 사실과 성폭력 행위가 공식적으로 드러나며 국방부가 사과를 발표했습니다.
5. 광주항쟁에 대한 왜곡과 논란
광주항쟁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왜곡과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신군부는 항쟁 초기부터 이를 “폭동”으로 규정하고, 북한 개입설과 같은 유언비어를 퍼뜨렸습니다. 이러한 왜곡은 일부 극우 세력에 의해 지속되었으며, 2020년대에도 인터넷상에서 광주항쟁을 폄훼하는 주장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특히 “광주교도소 습격” 사건은 신군부가 조작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이는 북한 개입설을 뒷받침하기 위한 의도적인 날조였습니다. 2024년 공개된 수사 기록에 따르면, 계엄당국이 시민군의 교도소 습격을 허위로 조작해 항쟁을 폭동으로 몰아가려 했던 정황이 드러났습니다. 이러한 왜곡은 광주항쟁의 진실을 가리고, 희생자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또한, 미국의 역할에 대한 논란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2021년 공개된 미국 국무부 문서에 따르면, 미국 대사 윌리엄 글리스틴은 계엄군의 진압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며, 미군은 한국군을 한미연합사에서 차출해 광주 진압에 투입하도록 허용했습니다. 이는 미국이 광주항쟁에 대해 방관하거나 암묵적으로 지지했다는 비판으로 이어졌습니다.
6. 현재적 과제와 미래
광주항쟁은 45년이 지난 2025년 현재도 여전히 진행 중인 역사적 사건입니다. 2025년 5월 16일, 광주광역시의회는 항쟁 45주년을 맞아 진상 규명과 5·18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을 요구하며, “5·18 정신은 과거의 역사가 아닌 살아있는 정신”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주요 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 진상 규명: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 명령 체계, 암매장 문제 등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 많습니다. 특히 발포 명령자와 헬기 사격의 구체적 책임 규명이 필요합니다.
- 왜곡 방지: 2020년 5·18 특별법 개정을 통해 허위 사실 유포를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으나, 여전히 왜곡된 주장이 존재합니다. 이에 대한 지속적인 교육과 대응이 필요합니다.
- 5·18 정신 계승: 광주항쟁의 정신은 민주, 인권, 평화, 통일의 가치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이는 현재 아시아 여러 나라의 민주화 운동에도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7. 결론
5·18 광주항쟁은 한국 민주주의의 뿌리를 이루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신군부의 폭력에 맞서 목숨을 걸고 저항한 광주 시민들의 희생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재확인시키며, 이후 한국 사회의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진상 규명과 왜곡 방지라는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으며, 이는 현재와 미래 세대가 함께 해결해야 할 책임입니다.
광주항쟁은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행동해야 할 살아있는 정신입니다. 5·18의 교훈을 되새기며, 더 나은 민주 사회를 향한 노력이 계속되기를 기대합니다.